3. 손빈과 "손빈병법"
손빈은 중국의 전국시대 중기 제나라 사람으로 생년월일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기"의 '손자오기열전'에 따르면 그는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예이며 제나라 왕실과는 친척 관계였다. 그는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공부했다. 훗날 방연이 위나라 혜왕의 장군이 돼있을 때 손빈을 위나라로 초빙했다. 그러나 방연은 자신의 재능이 손빈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질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방연은 손빈에게 누명을 씌워 그의 두 다리를 자르고 이마에는 먹물을 새겨넣었다.
그 뒤에 제나라의 사신이 위나라에 속아서 감금 상태에 있던 그를 몰래 제나라로 데리고 갔다. 제나라의 장군 전기는 손빈을 매우 존중하고 그를 제나라의 위왕에게 추천했다. 위왕은 손빈에게 병법에 관해 의견을 나눠 보고는 최고 참모장인 군사로 임명했다. "사기"의 '태사공자서'에는 "손자는 다리가 잘린 뒤에, 병법을 논하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따라서 손빈의 '빈'자가 '다리가 잘린다'는 뜻이므로 손빈이라는 이름은 그가 다리를 잘린 뒤에 쓴 이름일 것이다. 바로 그의 "손빈병법"은 형벌을 받은 다음에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써낸 역작이다.
"사기"의 '손자오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손빈은 유명한 두 차례에 걸친 제나라와 위나라간의 전쟁에 참여했다. 한 번은 기원전 353 년에 있었던 계릉 전투이고, 다른 한 번은 기원전 341 년에 일어난 마릉 전투이다. 계릉 전투는 위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일어났다. 제나라의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돕게 했다. 바로이 때 손빈이 군사로 따라갔다. 전기는 손빈이 말한 "적의 강점을 피하고 빈틈을 찌르는" 계략을 받아들여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으로 빠르게 공격해 들어가서 적이 반드시 구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놀란 방연은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군사를 돌려 수도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자 손빈은 길목인 계릉에 매복해서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것이 모택동도 여러 번 극찬한 "위나라 수도를 포위 공격해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다.
마릉 전투는 계릉 전투가 일어나고 13 년 뒤에 발생한다. 위나라와 조나라가 연합해서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는 또 전기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한나라를 돕게 했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을 받아들여 '취사용 솥의 수를 서서히 줄여 도망병이 늘어나고 있다'는 암시를 적에게 주었다. 그리고 기고만장해진 적이 추격해 오도록 유인하고 공격하기 좋은 마릉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위나라 군대를 단숨에 물리쳐 위나라의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위나라의 장군 방연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방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역사책의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사기" '전경중완세가'와 "손빈병법"의 '금방연', '진기문루'와 "전국책"의 '제책'등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어쨌든 손빈은 계릉과 마릉 두 전투를 통해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됐다.
손빈이 활동한 시기는 제나라의 위왕, 선왕 때로 제나라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춘추시대에 제나라는 관중이 재상이 된 뒤로 사회 개혁과 경제 부흥에 힘써 강국으로 부상했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면 전씨를 대표로 하는 새로운 귀족이 출현해서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 전국시대에는 위왕이 계속해서 개혁 정치를 펼치고 관리의 기강을 바로 잡고 부국 강병에 힘썼다. 손빈은 바로 이런 역사적인 배경 아래에서 등장한 풍운아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의 요구에 따라 군사 사상도 매우 발전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손자병법", "오자병법", "사마양저병법"등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마양저병법"도 제나라의 위왕 때에 펴냈다. "사기"의 '사마양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나라의 위왕이 한 대부에게 옛 판본의 "사마병법"을 정리하도록 하고, 그 속에 사마양저의 전기를 덧붙였다. 그러므로 이를 "사마양저병법"이라고 한다.
"손빈병법"도 바로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여러 병법서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실전의 경험을 정리해 편찬한 것이다.
손빈은 또다른 전략가인 오기와 함께 명성을 떨쳐 세상에서는 이들을 '손오'라고 함께 불렀다. "사기"에서 그들의 전기를 함께 실어 '손자오기열전'이라 했다. 바로 그 열전에 "세상에 그의 병법이 퍼져서 전해지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일찍이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서한 말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혀서 "한서"의 '예문지'에는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을 구분하기 위해 각기 "오손자"와 "제손자"로 나눠 불렀다.
"한서"의 '진탕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또 병법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공격군은 두 배 이상의 병력이 돼야 적과 싸울수 있으며, 수비군은 공격군의 절반의 병력만 돼도 맞서 싸울 수가 있다.'
이는 "손빈병법"의 '객주인분'에 나온는 말이다. '진탕전'에서 다만 병법이라고만 부르고 지은이를 따로 적지 않은 "손빈병법"이 당시에 매우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은이를 따로 표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빈병법"은 그 뒤 문헌에서 사라져, "수서"의 '경적지'에 이미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송대 이후 특히 명청 시대에는 "손빈병법"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계속 손자병법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다가 1972 년 산동성 임기현에서 한대의 한 분묘가 발굴됐다. 놀랍게도 다른 유물과 함께 한 무더기의 죽간이 나왔다. 바로 "손자병법", "울료자", "육도"와 같은 병서와 함께 "손빈병법"도 세상에 그 보습을 드러냈다. 이로서 "손빈병법"에 대한 의심은 일시에 푸렸으나 죽간이 많이 훼손돼 그 전체 모습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 가운데 11,000자 정도가 해독돼 대체적인 윤곽과 지은이의 기본 관점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책은 우리에게 전국시대의 군사 사상과 손빈이란 한 사상가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손빈병법"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손자병법"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우 풍부하며, 문제에 따라서는 "손자병법"의 견해를 뛰어넘는 곳도 적지 않다. 그로므로 "손빈병법"은 "손자병법"을 계승해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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